본문 바로가기

Football Life/Football Story

K리그의 탄생. (4부. 코리안리그)

K리그의 탄생. (4부. 코리안리그)


이웅평 대위의 미그19기가 날아와 전국을 잠시 전시상태에 몰아넣은 1983년 2월. 정부 관계자 둘이 롯데호텔 34호 밀실로 축구협회 회장 최순영, 부회장 장근영, 이원홍 KBS 사장을 호출합니다. 그리고 불과 며칠 뒤 축협 임원들도 전혀 들은 바 없던 ‘슈퍼리그’의 출범이 발표됩니다. 실업과 프로가 어우러진 명실상부한 한국 최강의 축구리그. 

  축협은 공식적으로 K리그의 시작을 이 슈퍼리그로 놓고 있으며 팬들 역시 의심의 여지를 두지 않습니다. 우리 K리그의 성격은 아마와 프로를 어울러, 지역연고를 기반으로, 홈&원정으로 진행되는, 단일리그입니다. 그런데 이에 한 발 더 나가 승강제까지 운영하던 축구리그가 슈퍼리그 이전에도 분명 한국엔 존재했습니다. 82년 초 모든 축구관련 기관을 통폐합한 축협은 실업 18개 팀이 서울, 인천, 수원, 청주, 춘천, 원주를 순회하며 풀리그를 치르게 하는 코리안리그를 출범시킵니다. 2년 차를 기해 팀들은 희망 지역에 연고지를 구축해 홈&어웨이 리그전을 펼치고, 승강제까지 도입한 어디를 봐도 유럽의 리그와 다른 점이 없던 축구리그였습니다. 

  
그간 언급된 한국적 특수성을 고려해 실업팀들만 참가한 코리안리그는 아마추어리그였다는 반론도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유럽의 반은 페레스트로이카 이후에나 프로축구리그가 생긴 나라가 됩니다. 아마추어 대회에 버젓이 상금이 걸리고, 선수 스카우트 전쟁은 물론 외국 용병이 와서 뛰는 건 또 무슨 경우이며 작금의 상무 참가는 어찌 설명되어야 할지... 

  
실업팀이 정체성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 문제는 더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정립되리라 봅니다. 하여 슈퍼리그가 한국 최초의 제대로된 축구리그라 인정할 수도 있겠으나 슈퍼리그 출범이 한국 축구 발전에 절대적 공헌을 했다는 축협의 자평은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대체 왜 축협은 1983년 슈퍼리그 출범에 그다지도 많은 의미를 입혀놓았는지 따져볼 필요를 느낍니다. 

  
1983년 축구붐이 일어난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짚어 슈퍼리그 출범 이전 이미 그 붐은 폭발합니다. 오랜 진통 끝에 리그다운 리그를 출범시킨 실업축구계는 흥에 겨워 있었습니다. 막상 승강제의 위력을 경험하고 나니 저때지 않으려면 비시즌에도 열심히 굴러줄 필요가 있다는 프로다운 마인드가 생겼고 실업대우의 두 달 일정 유럽 전지훈련을 비롯 대다수 팀들이 따뜻한 남쪽나라로 훈련을 떠나는 진풍경이 벌어집니다. 또한 흥행참패 요인이 성의 없는 경기로 일관한 선수들 자신에게 있음을 자성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드디어 축구리그는 상품, 관중을 소비자로 보는 인식이 스며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한 축구계의 변화를 팬들이 그냥 지나칠 리 없었습니다. 1983년 시즌 오픈 대회인 대통령배전국축구선수권. 거지같은 날씨 속에 교통 불편한 효창에서 벌어진 개막전에 1만 관중이 몰려듭니다. 다음날은 1만3천(효창 토탈캐파). 이어 자리를 서울운동장으로 옮기자 3만이 운집합니다. 축협에선 살다살다 별일이 다 있다는 반응이었습니다. 국제전에서 좋은 성적이 있었던 것도, 대표팀 선수들이 모두 복귀한 것도, 꽃미남 선수가 출현한 것도 아니건만 그냥 꾸역꾸역 몰려옵니다. 계속 비가 내려 축협 직원들은 밤을 새 운동장에 비니루를 까는 호들갑을 벌여야했습니다. 바로 전해 이 대회 평균관중은 겨우 백 몇 명이었습니다. 직접 찾지 못하는 지방 팬들이 축협으로 축하와 격려의 전화를 쏟아 붓던 기상천외한 나날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슈퍼리그가 이 잔칫상에 숟가락을 얹습니다. 

  
경기단체장이란 반강제로 임명되어 돈 뺐기고, 욕만 먹는 봉사직이었으나 그렇다고 경제인들이 이를 기피하진 않았습니다. 특히 인기종목의 경우 권좌를 향한 경쟁은 몹시 치열했습니다. 이 나라에서 이름께나 있는 경제인으로 행세하려면 경기단체장 명함은 필수였으며, 기업 홍보와 무엇보다 정권과의 유착에서도 효과는 삼삼했습니다. 바꿔 말해 정권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순수하게 축협의 작품인 코리안리그와 달리 슈퍼리그는 독재정권의 아이디어로 탄생합니다. 한국 축구를 살려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대를 절묘하게 이용한 우민화 정책의 일환이었고 축협으로서는 감히 이에 토를 달지 못합니다. 설상가상 할렐루야의 경영악화는 최순영 회장을 점점 코너로 몰고 있었습니다. 3S 정책의 기본은 대중에 대한 무시와 경멸입니다. 리그준비위원회가 전면에 내세운 명분은 더 늦추다간 프로야구에게 팬들을 다 빼앗기리란 유아적 발상이었습니다. 

  
정권이 개입하기 전 코리안리그의 성공 가능성을 목도한 축협의 기본 계획은 일단 프로 두 팀에게 계속 서커스 공연을 시키며 실업과 격리시켜놓고, 코리안리그를 통해 리그의 안정과 흥행을 마련한 뒤, 프로와 실업을 합체, 커진 파이를 통해 실업팀들의 프로화를 시도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쉽게 정리해 준비없이 자행한 프로팀 조기 창단의 실패를 인정하고 실업팀들이 유공, 할렐루야처럼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토양부터 조성한다는 목표입니다. 

  프로팀보다도 투자는 많이 하면서 공식 프로화에 뜸을 들였던 일부 실업팀들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축구의 흥행성은 리그를 통해서만 보존 가능하며 그 리그는 여러 팀의 공존을 통해서만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결국 개개의 이해관계란 시간이 알아서 해결해준다는 경제적 관점에서 리그의 성패를 관망하려던 긍정적 시도로 볼 수 있었습니다. 

  
반면 정권은 그 무소불위의 힘으로 프로팀을 더 찍어내면 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한 인위적 조화에선 원했던 원하지 않았던 기존 실업팀들을 버리고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야기된 혼란은 불행히 아직까지도 깔끔하게 정리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5월 8일 어버이날. 우승상금 5천만 원의 슈퍼리그가 전격 개막합니다. 정권의 닦달 속에 3개월 만에 완성된 졸속 리그. 전두환 이하 3부요인이 참석한 가운데 3만 관중이 운집한 서울운동장에선 어떤 무개념 아저씨가 던진 담배꽁초에 풍선이 연쇄 폭발하며 동원된 여고생 70여명이 화상을 입는 불길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출처 - 바셋풋볼(basset.egloos.com/1854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