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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otball Life/Football Story

K리그의 탄생. (2부. 실업축구의 저항)

K리그의 탄생. (2부. 실업축구의 저항)


유럽 축구의 프로화는 귀족층이 주도적 위치에 있던 축구가 산업혁명을 통해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한 도시서민들에게 넘어가는 과정에서 등장합니다. 반대로 한국의 경우 그 주도권을 재벌로 대표되는 자본세력이 틀어쥐게 됩니다. 당연히 만만찮은 저항이 있었습니다.

  
당장 실업팀들이 태클을 걸고 나섭니다. 잦은 대표팀 선발, 그나마 그 대표팀의 성적마저 거지같아 인기가 바닥을 치던 실업축구는 복수리그, 승강제, 시즌권 도입 등 여러 발전 방안을 마련하고 있던 터였습니다. 승강제란 일종의 우열반 제도로 성적에 따라 리그를 나누는, 현재 한국을 제외한 세계 거의 대부분 나라가 사용 중인 방식입니다.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이야기했던 그때. 신동아그룹의 강력한 자금력과 축협의 편애를 얻을 프로팀의 등장이 실업팀들에겐 달가울 리 없었습니다. 당장 실업 무대 주요 선수들을 전부 빼내어 60년대 말 사실상 국가대표팀이었던 중앙정보부 산하 ‘양지 축구단’급 전열을 갖추지 말란 법이 없던 할렐루야였습니다. 

  
최순영 신임 회장의 축구에 대한 투자폭격은 실업팀들을 충분히 겁주고도 남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폭격이 할렐루야에 집중된 건 아닙니다. 일단 대표팀을 수렁에서 건저야 했습니다. 코치진들의 대대적 해외연수가 이뤄졌고 훈련 및 처우도 크게 개선됩니다. 서울에 축구전용구장 건설이 추진되는 등 빚더미에 쪼들렸던 이전 축협의 모습과 크게 다른 변신이었습니다.

  
부자 축협으로선 먼저 실업축구를 달래야했습니다. 하여 할렐루야는 대표팀에서 물러난 노장급 선수들만 모아 선수 노후보장보험 역할을 하겠노라 약속합니다. 명색이 프로팀이 스스로 그 전력의 한계를 못 박은 동서고금을 통해 없었던 이상한 약속이었습니다. 물론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습니다. 

  한편 
의욕이 넘쳤던 축협이었으나 기실 별 성과는 없었습니다. 서울시의 비협조로 전용구장 플랜은 지지부진했고 대표팀 미국 전지훈련 땐 돈을 몽땅 도둑맞은 망신스런 일도 있었습니다. 결정적으로 모스크바 올림픽 진출권을 놓치고 맙니다. 친미권의 보이콧으로 어차피 못 나갔겠지만 말레이시아에게 두 번이나 패퇴하며 자존심을 있는 대로 구겨야했습니다. 그 중 한번은 0-3 떡실신 패배였습니다.

  
비상이 걸린 축협으로선 뭔가 면피 카드가 필요했기에 축구 프로화에 더욱 박차를 가합니다. 실업축구는 여전히 반발했습니다. 실업축구의 반대는 밥그릇 싸움 문제를 넘어 오늘날 시각으로 볼때 충분히 일리가 있었습니다. 프로화란 서둘러 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이것이 대세라면 실패를 각오한 추진력이 필요하기도 했으나 이땐 아직 프로팀들을 관할할 기구조차 없었습니다. 있다 처도 당장 관리할 프로팀이 달랑 하나! 프로팀 창단을 의사를 밝힌 할렐루야뿐이었습니다. 

  
그러던 1980년 6월. 때를 기다리며 칼을 갈던 축협과 실업축구연맹(이하 실축련) 사이에서 드디어 정면충돌이 일어납니다. 발단은 아직 공식 창단도 안 한 할렐루야가 차범근을 앞세운 프랑크푸르트를 인천공설운동장으로 불러들인대서 시작됩니다. 실축련은 축협에 등록조차 되지 않은 무자격 팀의 친선경기에 불과하다며 할렐루야로의 선수차출을 거부합니다. 그러자 축협이 이 경기를 국가대표 경기에 준하는 공식경기로 승인해버렸고 경기 당일 무려 11명의 선수가 소속 실업팀을 무단이탈해 할렐루야에 합류합니다.악만 남은 실축련도 가만있지 않았습니다. 할렐루야에 합류한 선수들을 3차실업연맹전에서 제명해버립니다. 

  이에 반발한 농협의 손창후, 자동차보험의 황정연이 사표를 쓰고 실업무대와 결별을 선언했습니다. 승패의 열쇠를 쥐고있던 선수 본인들이 옛정보다는 실리를 택한 것입니다. 
이때까지 할렐루야가 마련한 창단자금이 40억 원을 넘고 있었습니다. 그해 축협 일 년 예산이 9억이었으니 상상 초월의 거액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중 절반을 선수들에게 풀겠노라 공언한 할렐루야였습니다. 월봉 50~100만원에 승용차, 차량유지비, 주택구입 담보 등 화려 옵션은 기존 실업팀 특급선수 몇몇만 얻어낼 수 있었던 조건이었습니다. 선수들로선 기존 소속팀이 겁 좀 준다고 이 슈퍼직장의 부름을 거부할 까닭이 없었습니다. 다만 정작 할렐루야의 창단 주체세력인 이영무 등은 육군 충의 소속이었던지라 아직 도발을 삼가해야했습니다. 5공 공포 정치의 대명사 삼청교육대가 그로부터 대충 두 달 뒤 발족됩니다. 

  
선수들의 항거에 용기를 얻은 축협은 더욱 강경하게 실축련을 몰아붙입니다. 원칙적으로 실축련이 축협의 부하 단체라는 한계도 극복하기 힘든 핸드캡으로 작용합니다. 축협은 친할렐루야계 선수들을 출전 정지시킨 3차실업연맹전을 아예 비공식 대회로 격하시켜 버리는 초강수를 던집니다. 장소는 물론 심판들까지 참가를 금지시켜 놓으니 실업팀은 당장 경기 치르기도 어려운 상황에 놓입니다.  

  
그러던 9월 28일. 축협이 큰소리 땅땅칠 배경이 더해집니다. 아시안컵 준결승에서 신성 정해원의 두골로 북한에게 역전승을 거둔, 전두환도 즐거워 우승도 아니건만 축전을 보낼 만큼 환상적인 사건이 터진 것입니다. 북한전에 온 힘을 다 쏟은 대표팀은 3일 뒤 결승에서 쿠웨이트에게 케발리지만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당시 한국 축구의 숙원은 북괴 격파였습니다. 사재를 털어 축구에 투자한 최순영 회장에게 격려의 전화가 빗발칩니다.  

  결국 실업축구는 축협에 무조건 항복하고 맙니다.

  여세를 몰아 축협은 산하 한국프로축구연맹(이하 연맹)을 발족시키고, 연내 할렐루야 창단을 공식화합니다. 초대 감독으로 이미 고희의 연세셨던 김용식 선생을 모셔 팀의 상징성을 배가했습니다. 김용식 선생은 한국 축구 발전사의 중추를 담당한 선각자이심과 동시에 한국 개신교회의 전설적 부흥사 김익두 목사의 아드님이시기도 합니다. 혁명주체 이영무는 플레잉 코치로 합류합니다.

  
일본 프로야구와 잉글랜드 축구를 모델로 했다던 연맹의 정관들은 매우 훌륭했습니다. 다만 아직까지도 현실화 된 게 하나도 없습니다. 할렐루야가 내건 이익 중 10%를 교회에 봉헌하겠다는 약속에서도 볼 수 있듯 프로축구 비즈니스를 우습게 본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축구팀의 경제성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개선중인 지금도 축구팀을 통해 장기흑자를 본 팀은 없습니다. 

  
어쨌거나 1980년 12월 15일. 상대할 팀도 없는 동춘서커스단 성격의 나홀로 대한민국 프로축구팀 ‘할렐루야’가 공식 창단됩니다. 실업축구를 찍어 누르고 탄생한 태생적 한계로 그들과 어울릴 수 없었던 프로축구팀은 결국 실업축구가 이미 마련해놓은 멍석에 낄 수 없다는 치명적 약점을 가지게 됩니다.


출처 - 바셋풋볼 (basset.egloos.com/1852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