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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otball Life/Football Story

K리그의 탄생. (5부. 슈퍼리그의 실패)

K리그의 탄생. (5부. 슈퍼리그의 실패)


80년대 들어서 몰락으로 접어드는 듯 보였던 한국 축구가 가뿐하게 월드컵 본선 티켓을 연속으로 잡아채는 모습에 라이벌 국가들은 기겁을 합니다. 한국 스스로 주장하듯 그 해답이 프로리그 출범에서 있다고 판단한 이들 국가들은 수차례 첩보원들을 파견해 한국의 상황을 훑게 됩니다. 그리고 내린 결론. ‘배울 점이 없다!’ 

  
축구를 살려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대 속에 탄생한 슈퍼리그는 당연히 대박이었습니다. 첫 12경기에서 평균 유료관중 2만8천명이 입장합니다. 예상을 비웃으며 최고 인기를 누리던 프로야구마저 원펀치로 제압했습니다. 

  
리그 출범을 앞두고 이수환 리그준비위원장이 KBO에 연락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야구와 축구가 일정이 겹치는 날이 있느니 신생 축구리그를 위해 조정을 부탁한다는 청탁이었습니다. 헌데 막상 두 경기 장소, 시간이 정확하게 겹친 5월 15, 16일 양일간 다른 곳도 아닌 부산에서 축구는 야구보다 3만 명을 더 동원했고 결국 야구장은 무료개방으로 맞서야했습니다. 대우의 신차 맵시나 판매량이 대우 로얄즈 성적과 함께 동반 상승하는 모습에 럭키금성, 동아제약, 국제상사가 야구팀 창단 계획을 백지화하고 축구로 돌아섭니다. 

  
그해 7월 KBS가 실시한 전국민 여론조사에서 축구는 무려 50%의 지지를 얻으며 인기종목 1위를 차지했고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맨 부분에서도 신연호, 최순호가 금, 은메달을 휩씁니다. 자연히 외국에 유출되어 있던 스타 선수들이 속속 귀국합니다. 전국이 축구 열기로 데워지던 그때. 또 하나의 믿기 힘든 소식이 날아들었습니다. 멕시코 청소년월드컵에 출전한 박종환과 아이들이 우루과이를 꿇리고 4강에 진입한 쾌거였습니다. 타 팀들의 집중 견제로 막판 주저앉은 대우를 대신해 할렐루야가 초대 챔피언이 된 슈퍼리그 원년에선 총 40경기 42만1천8백 유로관중이 동원됩니다. 무료관중까지 합치면 60만이 넘었습니다. 

  
헌데 이 가공할 인기가 단 한 시즌 만에 죽어버리는 불가사의한 사태가 이어집니다. 이유가 불분명한 국민적 축구붐을 믿고 졸속으로 출범한 슈퍼리그의 수명은 우려대로 딱 일 년이었습니다. 

  
슈퍼리그는 기존 코리안리그를 2부리그로 흡수하여 실업팀들과의 공존을 모색합니다. 다만 그 방법이 공정하지 않았습니다. 축구란 놈은 신기하게도 사회적 부조리가 만연할 때 인기를 얻는 성향이 있습니다. 현실의 문제를 스포츠라는 공명정대한 경쟁시스템 아래서 대리만족하려는 서민들의 마음을 훔칠 줄 아는 놈입니다. 하지만 슈퍼리그는 부조리한 정권에 이해 탄생한 부조리한 리그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합니다. 

  
승강제는 실업팀에게만 적용됩니다. 즉 프로팀은 시즌 전패를 거둬도 절대 강등되지 않았습니다. 코리안리그의 주말 경기권을 박탈했고, 연고지마저 프로팀에게 내주어야 했습니다. 온 도민들이 힘을 쏟아 제일은행을 유치했던 강원도는 하루아침에 전국구 개신교팀이라던 할렐루야의 연고지가 됩니다. 할렐루야는 서울의 연고팀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더니 개막 진전에 가서 수익성을 이유로 홈&어웨이 방식 대신 순회공연 방식을 채택합니다. 이처럼 슈퍼리그는 이항대결 코드와 함께 사회통합 기능마저 포기했습니다. 차라리 그냥 내버려두었다면 최소한 코리안리그 팀들은 연고정착에 성공할 수도 있었던 순간이었습니다.  

  제대로 된 정관조차 없었던 축협과 연맹은 온갖 특혜를 부여한 재벌팀들의 과열경쟁을 전혀 컨트롤할 수 없었습니다. 연봉 1천5백 정도가 최고 대우였던 프로선수 몸값이 반년 만에 4천까지 수직상승합니다. 슈퍼리그 선수들 평균 급여는 프로야구의 6배에 이르렇고 재정난 초래를 걱정한 팀들이 담합을 시도해보기도 했으나 스스로 파기-재도입을 거듭하며 자기 무덤을 파나갑니다. 

  
공공적 성격이 강했던 코리안리그와 달리 재벌그룹의 홍보부였던 프로팀들은 헬기 타고 댕기며 경기 챙기시던 열혈 회장님들을 만족시켜드릴 수밖에 없던 입장이었습니다. 무조건 이겨야했기에 볼썽사나운 안티축구와 판정불복, 경기 보이콧이 하루가 멀다 하고 펼쳐집니다. 축구는 야구와 달리 매일 경기를 벌여 회장님의 관심을 분산시킬 수 없었습니다. 일등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개발시대 경제논리는 축구에 그대로 반영됩니다. 오늘날까지 도저히 깨기 힘든 ‘K리그는 재미없다!’란 편견이 코드화되어 국민들의 뇌에 입력되기 이릅니다. 꼭 편견이라고 치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문제의 심각성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 듯 축협과 프로축구연맹은 인기절정 슈퍼리그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 파워게임에 몰두했습니다. 하지만 곧 슈퍼리그의 인기가 땅으로 추락하고 아마축구마저 흥행참패를 이어가자 자연히 최순영 회장 체제는 그 힘을 잃어갑니다. 결국 주도권을 빼앗은 프로팀들은 슈퍼리그 간판을 내리고 실업팀들을 배제한 ‘프로들만의 리그’로 떨어져 나와 실업과 프로는 이제 도저히 한 배를 타기 힘든 한국형 구조를 완성합니다. 

  
리그의 패망에 기름을 부은 건 무엇보다 단 일 년 만에 뒤바뀐 정권의 리그 정책에 있었습니다. 정권도 축협도 국격의 상징 화랑의 전력 상승에 도움이 된다는 믿음 아래 프로화를 추진합니다. 그런데 83년 연말 IOC가 돌연 LA올림픽 프로선수 출전금지를 발표합니다. 올림픽이 프로에 개방된다기에 프로화를 서두른 정권에게 이제 슈퍼리그는 눈에 가시가 됩니다. 추가 프로팀 창단이 금지되었고, 리그 상금규모도 절반으로 삭감됩니다. 기존 프로팀들에겐 작아진 파이를 실업팀들과 나눠가질 이유가 사라집니다. 승강제는 당연히 거부되었고, 코리안리그와 슈퍼리그는 동반으로 풍비박산납니다. 

  
1985년 벽두. 방송사들이 축구리그 생중계를 없애기로 합니다. 정부가 낮 경기 생방을 불허한 까닭이었습니다. 야구와 달리 축구는 야간경기가 가능한 곳이 몇 군데 없었습니다. 나아가 정부는 프로야구의 몇몇 사례를 들어 연고제가 지역감정 악화에 영향을 준다며 태클을 걸어옵니다. 지역연고 필요성을 역설하던 정권의 나팔수 축협과 프로팀들은 돌연 떼거지로 몰려다니는 순회공연이 오히려 흥행에 도움이 된다고 떠들기 시작합니다. 불행히도 어느 정도 기간까진 이 주장이 사실이었습니다. 


출처: 바셋풋볼 (basset.egloos.com/18546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