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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otball Life/Football Story

K리그의 탄생. (3부. 그 둘만의 리그)

K리그의 탄생. (3부. 그 둘만의 리그)


시어머니와 며느리, 찬 놈과 차인 년이 막장 이항대립 구조를 만드는 한국 TV극이 아시아를 휩쓸고 있습니다. 갈등은 드라마의 원동력이며 흥행의 필수코드입니다. 유럽리그의 흥행 기반이 바로 이 코드에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예외 없이 모든 나라에서 라이벌전을 통해 리그는 탄력을 받게 됩니다.

  
유럽 축구사가에선 유교 영향을 받은 동양축구 경우 화합과 통일을 중시하다가 막장대결 토대를 마련하지 못했단 주장이 있습니다. 그걸 꼭 공자님 탓으로 돌이긴 무리가 있지만 동아시아가 적대적 정서를 가진 라이벌 팀이 포진하는 모양세를 제도적으로 막았음은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전국의 개신교도들을 모두 서포터로 거느려야 했던 할렐루야의 특성상 유럽식 지역연고라는 걸 정할 순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설사 정한다 한들 이항대립은커녕 경기할 상대조차 없었던 할렐루야였습니다. 대한민국 프로축구는 태초에 국민들의 흥미를 끌기 힘든 모습을 보여주게 됩니다. 사람들이 느낀 최초 프로축구팀의 정체는 대표팀 화랑의 OB팀이었습니다

  
불교계의 프로축구단 창설마저 흐지부지 되자 할렐루야는 효창구장 청소나 하며 하릴없는 나날을 보내게 됩니다. 가끔 외국의 프로팀을 초청해 경기를 치르기를 9개월. 그 사이 달랑 5경기를 소화했습니다. 이러니 프로팀 창단을 고려했던 대우, 포철이 슬슬 눈치를 보기 시작합니다. 프로축구연맹은 사실상 이름뿐인 유령단체였습니다. 정부는 고사하고 협회 차원의 프로축구 지원과 정책은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핵심 중에 핵심 문제인 대표팀과 프로팀의 공존 정책이 전혀 논의되지 않습니다. 

  
당시 축협은 예산의 60%를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에 쏟아 붓고 있었습니다. 한국의 축구에는 오직 국가대표팀만 존재했습니다. 이런 토양에서 프로팀을 만들어 할렐루야 수준의 운영비를 쏟아 부으면서도 정작 소속 선수들은 연중내내 대표팀 동남아 순회공연에 동원시켜야 한다면 박태준, 김우중이 정신병자가 아닌 이상 프로화에 협조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를 가지곤 당연히 당초 프로화의 일차 목표였던 선수들의 해외이탈 방지를 막지 못합니다. 81년에 들어서자마자 박창선, 이강민이 홍콩, 조영증, 김황호가 미국, 박종원은 독일 카이저스라우테른 진출을 선언합니다. 정해원같은 이는 해외진출을 위해 학교를 자퇴하기로 합니다. 81년 1월 기준, 해외에서 활동한 국대급 한국 선수는 무려 17명에 이릅니다. 설상가상 프랑크푸르트와 PSV가 차범근, 허정무의 월드컵 예선 출전을 거부해버립니다. 

  
세월은 축협의 똥줄을 태워가며 그냥 흘러만 갔습니다. 할렐루야랑 놀아줄 프로는 만들어지지 않고, 실업은 텅빈 구장에서 그들만의 경기를 치렀으며 대표팀은 중동세에 현저히 밀리기 시작합니다. 월드컵 출전권도 날아갔습니다. 세계청소년선수권에서 최순호의 맹활약으로 이태리를 까부순 사건이 1981년의 유일한 위안거리가 됩니다. 

  
프로야구가 출범한 대망의 1982년이 시작되기가 무섭게 축협은 86아시안 게임과 88올림픽 대비를 이유로 실업축구연맹, 대학연맹, 중고연맹을 통폐합합니다. 팬심을 잃은 실업축구의 반발은 의미가 없었고 딱히 반대할 명분이 있지도 않았습니다. 

  
한국 축구 초유의 환란시기. 석유공사에서 연말을 목표로 프로팀 창단을 선언, 흐지부지되는 줄 알았던 프로화의 숨통을 풀어놓습니다. 선경에 인수되며 공기업에서 사기업으로 전환한 유공은 뭔가 공공적 사업을 벌일 필요가 있었습니다. 거액을 들여서라도 차범근, 허정무 등 문화재 반환에 성공하겠다며 기염을 토하기도 합니다.  

  한편 선구자 할렐루야가 심각한 내분에 휩싸입니다. 개신교도들만 입단을 허가하다보니 선수층 두께가 자금력과 비례하지 않던 그들만의 반자본주의 구조적 한계가 드디어 표면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82년 중반 즈음 가서는 앞으로 교회 나가겠단 말만 해도 팀에 받아주는 경우가 빈번해집니다. 이미 강조했듯 이 팀의 연봉은 실업팀들의 두 배를 상회했습니다. 스쿼드에 나일론 신자들이 넘쳐날 조건이 마련된 셈이었습니다. 심지어 함흥철 감독마저 개신교인이 아니었습니다. 이에 가뜩이나 불만이 가득했던 창단주체 개신교 원리주의자 선수들에게 팀은 교회활동 대신 축구에 좀 신경 쓰라고 다그치길 반복합니다. 결국 이영무, 신현호, 조병득, 박민재, 김철용이 팀을 탈퇴하고 맙니다. 

  
할 일 없이 빈둥거리던 할렐루야를 보다 못한 축협에서 그해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에 대표팀 상비군 대신 할렐루야를 박아주었던 터였습니다. 망신을 당하지 않기 위해선 '신앙은 묻지마!' 전력수혈이 필요했고 그렇게 할렐루야는 초기 순수 개신교팀의 색깔을 잃어갑니다. 

  
그 와중에 벌어진 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쇼크! 전쟁 통에 급조해 나온 이란은 물론, 눈감고도 이긴다던 일본에게 연패하며 아시안게임 조별리그에서 탈락하고 맙니다. 대신 국민 요정 최윤희가 수영 금메달을 휩쓸었는데 다행히 그땐 변변한 축구장이 없어 물 채우잔 소리까진 안 나왔습니다. 축구협회 부회장 등 5명의 임원 목이 달아났고 최순영 회장은 살아남았습니다. 그리고 2년 전과 비슷한 면피 카드가 등장합니다. 축구 프로화 추진... 

  
25세 이상 실업선수는 소속팀의 동의 없이 프로전향이 가능하단 실질적 프로축구 우대 특별법이 생겨납니다. 노골적 유공과 할렐루야 밀어주기의 결과는 두 팀간 숙명의 스카우트 전쟁으로 이어집니다. 제일 먼저 박종환 감독이 이끌던 실업최강 서울시청이 초토화되고 맙니다. 다신교 할렐루야는 홍성호, 최종덕, 박성화, 황재만으로 이어지는 국대 수비라인을 그대로 자기 팀에 옮겨 심을 수 있었습니다. 

  
또 축협은 우수선수 중 10여명을 뽑아 서독 클럽에 임대하기로 합니다. 요즘 축협이 벌이는 유소년 연수 이야기가 아닌 오직 군필자를 대상으로 한 국대 전력강화 프로그램으로, 해외진출을 막는다며 프로팀을 만들자던 축협의 이중적 모습이었습니다. 서독 리그는 프로, 아마 구분이 없으니 올림픽, 아시안게임 출전도 상관없다는 주장입니다. 
  
  축협은 유럽 축구리그의 핵심을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아마와 프로의 경계는 무의미합니다. 그런데 한국에선 그 경계가 필요했습니다. 축협이라는 한 지붕 아래 있으면서도 신자본세력과 몰락직전 기득권세력의 동거는 불가능했습니다. 결국 82년 12월 유공이 창단되자 할렐루야와 달랑 둘이서 전국을 순회하며 20여 경기를 벌이는 씨름대회 모양세의 프로리그가 만들어집니다. 같은 시기 실업축구는 기존 모든 대회를 통폐합하여 한국 최초 유럽식 풀리그를 구성합니다. 


출처 - 바셋풋볼 (basset.egloos.com/18533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