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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otball Life/Football Story

K리그의 탄생. (1부. 할렐루야의 탄생)

K리그의 탄생. (1부. 할렐루야의 탄생) 

연초엔 호메이니가 이란에서, 연말엔 전두환이 한국에서 쿠데타를 일으킨 1979년. 바로 그해 1월, 친박연대 대표로 공천장사하다 얼마 전 실형받은 박정희의 조카 박준홍이 유신정권의 차관급 정무조정실장에 발탁되며 대한축구협회(이하 축협) 회장 자리를 내놓습니다. 5개월 최단명 축협회장이었습니다. 후임으로 이제 갓 경영권을 승계 받은 신동아그룹의 젊은 총수 최순영이 지명되었습니다. 이때를 시발점으로 K리그의 탄생을 이야기해보도록 합니다. 

63빌딩으로 유명한 신동아는 국민의 정부 시절 박살이 났습니다. 이는 한국 개신교단이 DJ를 싫어하는 많은 이유 중 하나로 최순영 회장이 한국의 대표적 개신교 기업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기도하는 축구선수 이영무를 위시로 국가대표급 개신교도 선수들이 함께 볼을 차던 친목 축구팀이 하나 있었다. 해외 원정을 다니며 유식해진 이영무는 종교를 매개로 결성된 외국 클럽들로부터 영감을 얻어 이 팀을 한국 최초의 프로축구팀으로;업그레이드할 구상을 합니다. 십일조 꼬박꼬박 축협에 박아 넣던 최순영 회장의 등장이 이영무 구상에 날개를 달아준 셈이었습니다. 



 상륙 100주년 즈음을 맞이하던 한국의 개신교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오신 일명 오피니언 리더들과 마구마구 양산되던 신부유층을 등  에 업고 빠른 속도로 세력화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서 주도적 자리에 올라서던 개신교단이었기에 축구 역  시 그 영향을 받았음이 특이하게 주목해야할 만큼 대단한 일은 분명 아닙니다. 유럽의 경우도 소시민들을 대표하던 교회가 상류층을  대표하던 학교와 함께 초기 축구팀 생성에 커다란 공을 세웁니다. 잉글랜드의 아스톤빌라, 볼튼, 맨시티, 에버튼, 사우스햄튼, 리버  풀, 울버햄튼 등이 직간접적으로 교회와 연관이 있었습니다. 


 결국 1980년 1월. 최순영 신임 축협회장은 선교를 목적으로 하는 개신교 프로팀 창단을 천명합니다. 안정될 때까지 국가의 기금인  축협 예산으로 지원까지 약속한 파격적 대우였습니다.(어차피 그 예산이 회장님 주머니에서 나오는 거긴 합니다) 지금 같았음 조계  종에서 소림사를 초청해 박살을 냈을 소리지만 당시 사회 분위기는 다분히 친 기독교적이었습니다. 


지금의 박주영과 달리 이영무가 골 넣고 기도한다고 문제 삼는 사람 하나도 없었습니다. 언론은 한국 축구의 프로화란 칼을 빼든 신임 회장에게 갈채를 보냈습니다.


여기서 먼저 축협이 생각한 ‘프로’의 의미를 정확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사전적 의미에서 프로페셔널이라 함은 크게 두 가지 뜻을 가집니다. 하나는 ‘직업적 선수’입니다. 그러나 축구를 통해 소득을 올리는 선수 혹은 팀은 이미 1950년대부터 대한민국에 공식적으로 존재했습니다. 우리는 이들을 실업 선수라고 부릅니다.


프로의 또 다른 뜻은 ‘전문가’입니다. 즉 기존 팀들과는 격이 다른 월등한 실력을 자랑한 팀이라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헌데 이 역시 새로 조직될 개신교팀에는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훌륭한 팀인 건 분명하나 그에 비해 기존 실업팀들이 비전문적이었다 주장할 근거는 없었습니다. 골프나 바둑처럼 시험을 통해 프로선수가 등용되지도 않습니다. 


또한 축구에선 이미 프로스포츠로서 큰 인기를 누리던 레슬링, 권투 등과 달리 프로란 이름으로 특화해놓아도 경기방식이 똑같습니다. 최소한 야구는 배트 재질이라도 차이가 있었고, 거의 동시에 여러 팀들이 생겨나 자체 리그를 만들더니 여기가 프로고 나머지는 아마라고 규정하며 그 정체성을 확실히 만들어냅니다.


한국 최초의 프로축구단 '할렐루야'(이 시기까진 가칭)를 특화 시킬 수 있는 명목은 단 하나! 기존 실업팀들 보다 월등하게 급여가 높다는 점에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 축구계에는 선수들에게 고소득을 보장할 팀들이 절실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할렐루야 탄생의 가장 큰 배경이 됩니다. 



상황은 박찬호 신드롬이 전국을 뒤흔든 90년대 말과 유사했습니다. 차범근이 독일에서 잭팟을 터뜨린 이후 외국 스카우터들의 관심이 한국에 모아집니다. 범국민적 성화에 군사정권이 차범근의 군복무 기간을 줄여줘야 했을 정도로 해외진출은 부와 명예를 한 번에 쥘 수 있는 기회로 인식됩니다. 아니나 다를까 선수들의 탈 한국 러시가 이어졌습니다. 유럽, 미국, 홍콩, 싱가폴까지 더 좋은 조건을 찾아 선수들은 줄기차게 빠져나갑니다.


축구대표팀을 국위선양의 선봉에 세웠던 정부에겐 골 아픈 현상이었습니다. 한국은 세계 축구사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대표팀 위주로 축구정책을 편 나라였으며 이 시기를 가장 극성기였다 부를 수 있습니다. 축협이 생겨난 이래 대표팀이 치른 경기는 1000경기가 넘습니다. 연간 20경기 이상을 치렀으니 당시 실업리그에서 연간 한 팀이 치르는 경기보다 많습니다.


결국 차범근과 김재한이 외국 프로팀 소속이란 이유로 대표팀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치명적 전력 공백이었습니다. 이제 한국 축구도 국제적 대세에 순응해야 했습니다. 프로선수의 출전이 금지되는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을 위해 계속 대표팀을 아마추어 상태로 유지하려다 나날이 그 규모가 커지던 월드컵까지 말아먹게 될 판이었습니다. 더하여 올림픽도 프로의 출전을 허할 듯한 움직임이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프로화는 선수들의 해외진출 저지를 통한 대표팀 전력 확보 외에 실리적 이유로도 필요한 변화였습니다. 스포츠 비즈니스에선 선수를 재화로 치고 팀간 거래가 성립됩니다. 선수를 사가며 기존 그 선수의 소속팀에 지급하는 대금을 이적료라고 부르는데 한국의 실업팀들은 스스로 만든 올림픽 출전용 편법적 족쇄인 아마팀이란 신분 때문에 그 이적료를 제대로 받아낼 수 없었습니다. 


좋기야 기존 실업팀들이 선수들 페이를 올려 해외유출을 막아주면 감사하련만 현실에선 정부기관이나 공기업 혹은 정부의 닥달에 못이겨 축구팀을 운영하던 곳이 대부분이던 실업팀들에겐 그런 재정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이때 막강 재벌그룹과 전국 교회의 헌금함을 배경으로 할렐루야의 창단이 선언됩니다.


할렐루야는 한국 축구에서 아마와 프로의 선을 그어준 의미있고 역사적인 팀입니다. 물론 그 선은 여호와 찬양하느냐 마느냐가 아닌 자본주의의 논리로 그어졌습니다. 한국 축구의 프로화는 재벌과 축구의 만남으로 탄생됩니다. 축구 내에서 새로운 자본계급의 탄생이었습니다. 여기에 억지로 종교적, 공공적 성격을 부가한 할렐루야는 이내 그 한계를 들어내고 맙니다. 


출처: 바셋풋볼 (basset.egloos.com/1852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