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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otball Life/Football Story

재일동포와 축구 (2)

재일동포와 축구(2)


 국내와의 큰 교류는 없었지만 재일교포들은 축구에서만큼은 일본에 질 수 없다라는 신념으로 일본 내에서 큰 활약을 

했으며, 재일동포에 대한 차별과 장벽이 심했던 과거에는 일본전역에서 이름을 날린 재일축구 선수들이 많았다. 조선학교

(조총련계)는 일본에서 교육기관으로 인정받지 못했기에 축구대회 참가자격이 주어지지 않았으나, 하지만 전국대회 참가

하는 일본 팀과의 연습경기를 통해서 자신들의 실력과 존재를 알릴 수 있었다.


해방 후의 재일축구

1948년 민족학교가 총련계를 통해 설립되었기에 조선인학교 폐쇄령이 실시되었고, 시위 중 16세 학생이 총에 맞아 희생

되는 사건이 벌어진 이후 1949년 도쿄 조선고급학교가 도쿄도 관할의 공립학교인 도립조선인학교로 바뀌었다. 도립학교

로 바뀌면서 대회에 참여 할 수 있었고, 체육교사였던 김세형에 의해 1954년 열린 제3회 고교축구 선수권대회(現 간토

대회)에 출전하여 준결승에 올랐으며, 33회 전국고교선수권 대회에 참가하여 4강에 진출하였다. 하지만 1955년 학부모

들의 요청으로 민족교육을 위해 다시 비인가 학교로 돌아가며 일본고교체육연맹에서 제적되었고 대회에 참여 할 수 없게 

되었다. 


 이후 일본 전역의 민족학교들만의 대회를 창설해 정기전을 실시하였으며, 특히 실력이 막강했던 1980년대에는 전국고교

선수권에 참여하는 일본의 명문 축구부들과의 친선경기 요청이 쇄도 하였다. 이는 조고 참배라는 명칭으로 불리었다

조선학교를 이겨야 진정한 일본의 최강이 될 수 있다는 의미였던 것이다. 특히 도쿄조선학교는 전국고교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일본학교 팀들이 진정한 일본의 최강을 가리자며 친선경기를 제의하였고, 이 팀들을 상대로 매번 승리하였다.

하지만 1993J리그 출범을 기점으로 일본에서 축구 붐이 일어나며 급속도로 발전한 일본팀과의 경기에서 연전연패를

기록하였고 친선시합, 연습경기 요청이 줄어들었고, 당신들한테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며 친선경기를 거절하는 팀까지 

생겼다고 한다.

 

 그러던 1994년 재일 학부모들의 시민운동과 민족학교의 고교체육연맹 대회 참가 불허에 대한 인권침해라고 규정한 일본 

변호사외의 노력으로 1996년 전국고교축구선수권대회 참가 할 수 있게 되었으며, 2006년 오사카 조선학교는 84회 전국고

교축구선수권에서 8강에 진출하였다. 조선학교의 선수들은 일본 대학 축구부에 스카우트 되거나 J리거가 되는 선수들이 

늘어나고 있다.

 

 

                                            조선학교 축구부 선수들


재일조선인축구단

위처럼 강했던 조선학교의 선수들은 학교 졸업 후, 민족계열인 조선대학교에 입학하여 대학까지 축구를 할 수 있었지만

이후 실업팀에 진출하는 것은 원천적으로는 불가능했다. 당시 일본축구는 기업에서 운영하는 실업팀 형태로 운영되고 

있었는데, 재일동포를 불러주는 일본기업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끔 일본으로 귀화하여 개명하면 입단을 허용하겠다는 

제안을 하는 기업도 있었지만, 민족적 자긍심이 높았던 선수들은 그에 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1961년 사업에 성공한 재일동포들이 후원하고 조총련이 운영을 뒷받침하는 형태로, 재일선수로만 구성된 상설 

프로축구단인 재일조선축구단을 창단하였고 비록 적은 액수지만 축구로 보수를 얻었다. 창단 멤버는 대학에서 유명선

수로 활약했던 리창석, 김명식 등의 선수로 구성 되었다.

 

그들은 1962년 일본을 종단하는 장기 원정을 실시하며 일본의 강호 대학팀들과 23전 전승이라는 전무후무의 기록을 

달성했으며, 19785<도쿄스포츠> 기사에는 17년간 5705272617패를 기록했다고 전해지며 이 기록에는 

일본리그 우승팀인 후지타 고등학교, 당시 일본 최고의 실업 팀인 요미우리(베르디 도쿄1969)와의 시합도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또한 1977년과 1978년에는 스리랑카 국가대표팀과의 친선시합도 가졌다. 재일조선축구단은 일본 공식 

대회에는 참가 할 수 없다는 한계가 존재 했으나, 전국 각지의 연습경기를 통해서 재일동포들의 민족적 자긍심과 긍

지를 새기는데 큰 역할을 차지했다. 하지만 1993년 일본 J리그 출범과 함께 재일조선축구단의 존재 가치는 무너지기 

시작했고, 1999년 재정난으로 해산 되었다.

 

재일동포와 북한축구

근래 안영학, 정대세 등의 선수들이 북한대표팀에 차출되며 재일동포 선수들이 북한대표팀으로 뛰는 것이 널리 알려

졌는데 이는 꽤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1966년 영국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북한대표팀의 8강 진출로 인해 재일동포와 

북한의 축구교류가 시작됬고, 재일동포 출신 1호 북한대표팀 선수로 알려진 김광호는 1980년부터 차출 되었다. 김광

호는 1973년 조선대 소속으로 북한 원정경기에 참여하며, 북한 축구 코치진 눈에 들었으며 1980년 대표로 선발되어 

모스크바 올림픽 예선, 아시안컵 등 대회에 북한대표로 출장 하였다. 김광호는 본인이 1호선수가 아니며 1호는 최창원 

선수라고 지칭했으며, 이를 통해 공식기록은 없지만 이전부터 북한대표팀에 선발 된 재일동포들이 많았다는 것을 미루

어 짐작 할 수 있다. 2010년 월드컵에는 J리그에서 활약한 안영학, 정대세, 량용기 선수가 발탁 되었으며 최근에는 J2

서 뛰고 있는 리영직 선수 정도만 선발되고 있다.  


   

                                    2010년 월드컵 관련 정대세, 안영학, 량용기 사진


참고 문헌 및 사진

우리가 보지 못했던 우리선수 - 신무광 저서


위의 내용 중 잘못된 내용 또는 오기가 있다면 연락 부탁드립니다.

seonedved@naver.com